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4세 (문단 편집) === 백성들에게 [[사생활]]을 공개한 [[왕]] === 루이 14세 부처(夫妻)의 [[베르사유 궁전]] 생활은 일찍부터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공개되었다. 특히 일요일의 만찬은 누구나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루이 14세의 [[삶은 계란]] 까먹는 모습이 우아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구경꾼들이 [[먹방|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왕은 그런 국민들의 기대에 답하기 위해 한 번에 5개씩 까먹기도 했다. 한편 루이 14세의 식탐은 대단했다고 알려졌는데 연회가 열릴 때면 폭식을 해서 [[엘리자베트 샤를로테|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루이 14세의 남동생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두번째 부인.]는 "국왕 폐하께서는 4종류의 [[수프]]를 따로, [[꿩]] 2마리를 모두, 큰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햄]] 2조각, [[마늘]]소스로 양념된 [[양고기]] 한 접시, [[페이스트리]] 한 접시 가득, 마지막으로 [[과일]]과 [[삶은 계란]]을 드시는 것을 자주 봤다. 폐하와 '남자 분'[*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남편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를 가리킨다.]은 모두 삶은 계란을 지나치게 좋아하신다"라고 기록했다.[*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남편이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투덜거릴 정도로 검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자신은 파리 사람들이 자랑하는 온갖 진미나 커피, 차, 초콜릿과 같은 사치품보다는 베이컨이 든 양배추 수프나 [[맥주 수프]]를 더 좋아한다거나, 자기 생각에는 왕이라면 모름지기 자우어크라프트와 훈제 소시지로 식사하며 근검절약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 즉, 그녀가 루이 14세와 필리프의 식탐에 대해 남긴 기록은 "왜 자기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고 저렇게 ~~처~~먹어댈까?"와 같은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 평생 [[체증|소화불량]]과 [[장염]], [[당뇨병|당뇨]] 등에 시달리면서도 식탐을 놓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폭식이 남성미라는 시선과 쇼맨십 때문도 있지만 어린 시절 프롱드의 난으로 겪었던 가난과 배고픔 때문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이때까지 포크나 젓가락같은 식사도구가 없어서 왕족도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 루이 14세 시기에 이르러서야 [[포크]]가 막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손자가 포크를 사용하려고 해도 "나는 칼과 손가락 말고는 다른 걸 사용해 본 적이 없어"라며 못하게 했다고 한다. 포크를 사용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면서 손으로 음식들을 마구 집어 먹었다. 다만 말년에는 얌전히 포크로 음식을 먹었고, 이는 곧 전 유럽에 유행으로 퍼져 비로소 식사때 손 대신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에티켓으로 자리잡았다. 최후에는 몸의 반신이 썩어 들어갔는데, 그 상태에서도 귀족들을 불러 모아 작별 인사를 했을 정도로 쇼맨십이 강했던 인물이다. 왕으로서, 자신의 삶이 노출되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았던 인물. 심지어 평민이라 해도 정장을 제대로 갖추면 베르사유에 마음대로 들어올수 있어서, 베르사유 궁 앞에는 당시 정장에 필수요소인 [[스몰 소드]]를 대여해 주는 대여점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왕비의 옷 입는 법, 화장법, 심지어 [[출산]]까지도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나 출산 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산모(왕비)가 기절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유럽]] 왕실에서 왕비의 [[출산]]은 공개적 행사였다. 혹여 사산된 태아를 남의 살아있는 아기로, 딸을 낳았다가 남의 아들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족 부인들만 참여하는 조용한 분위기로 치러졌다.] 게다가 [[출산]]을 할 때 별로 좋지 않은 자세인 쇄석위(碎石位, [[https://www.healthline.com/health/lithotomy-position|lithotomy position]], 절석위, 切石位)를 퍼뜨린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이런 힘든 자세로 낳게 된 이유는 루이 14세가 자신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에 너무 집착하여 당시 [[출산|분만]]법이었던, 의자에 앉아 아이를 낳는 것을 테이블에 누워서 등자로 다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명령했고, 이 시기 때 아기를 꺼내기 위한 겸자가 발명되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해당 자세는 프랑스의 산부인과 의사 프랑수아 모리소(François Mauriceau)가 여성이 분만할 때 등을 대고 눕는 것을 권장[* 진통이 길면 하루 이틀이 넘어가는데 그동안 앉는다면 다리와 척추에 압력이 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혈전이 생겨 죽는 일도 있다. 그리고 해당 자세는 분만 동안 의료적 처치를 하기 좋다는 장점도 있다.]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다. 단, 선술한 왕비의 공개 출산은 사실이다. 또한 [[커피]]를 무척 좋아해서 당시만 해도 [[오스만 제국]]이 독점하던 커피 원두를 선물로 가득 받고, [[제2차 빈 공방전|오스만 제국의 빈 침공]]에 대해 일절 무시한 바 있다. 물론 단순히 커피만 받아서가 아니라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를 어느 정도 견제해야 했던 현실적 이유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선 "겨우 커피 콩에나 넘어가는 뚱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당시 커피 원두는 무지 비싸서 뇌물로서 값어치가 있었던 점도 있다. 다만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을 적대하며 오스만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차였던 걸 감안해야 한다. [[근세]](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대륙]]의 주도권을 쥔 최강자 지위를 두고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국]]과 격렬하게 경쟁하던 것이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진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다른 영토들)이었고, 이 경쟁 구도에서 '''기독교(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여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다른 기독교 국가들의 비판을 감수하며 오스만 제국과의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 프랑스의 대전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와 루이 14세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의 심장부인 빈을 공격하는 것은 종교적 입장때문에 차마 돕기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이유는 더욱 없고, 그저 [[베르사유 궁전]]에 편히 앉아 [[와인]]이나 빨면서 "잘한다, 잘한다, 신나게 싸워라"하고 낄낄거리면 딱 적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이 루이 14세에게 커피 원두 선물을 잔뜩 보낸 것은 "이것을 받는 대신 무슨 행동을 해 달라"는 직접적인 뇌물이라기 보다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중요한 유럽 내 동맹국의 왕에게 보내는 친선 목적의 예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고, 반대로 오스트리아 인들이 "커피콩에 넘어간 뚱보"라고 루이 14세를 욕한 것은 안 그래도 이쁘게 보기 힘든 경쟁국 국왕이 적국과 알콩달콩 선물이나 주고받으면서 자국의 심각한 군사적 위기를 구경하며 간보고 있으니 사실관계에 부합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트집거리는 뭐든 찾아서 가져다붙여 욕하는 데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오스만이 2차 빈 공방전에서 패하고 발칸반도까지 밀리자, 오스트리아의 스트라스부르ㆍ자르ㆍ뤽상부르와 팔츠 선제후국을 공격해 오스만이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후 신성동맹의 2/3가 프랑스 방면으로 군대를 돌리면서,잉글랜드ㆍ오스트리아ㆍ네덜란드의 침공을 받으며 프랑스가 식량난을 겪자,오스만이 식량을 공급해주기도 했다. 당시로써는 커피 원두가 무척 비쌌다는 것 역시, 아무리 비싼 사치품이라도 한 나라, 그것도 프랑스와 같이 큰 나라의 왕을 매수하여 국가의 향방을 좌우하기에 충분할만큼 값비쌀 수는 없고, 절대로 바보가 아닌 루이 14세가 이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친선 목적의 예물이라면 값지고 귀한 물건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이후 프랑스는 급성장한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전통적인 라이벌이던 오스트리아와 [[마리 앙투아네트|혼인동맹]]까지 맺게 되고, 이 프로이센이 성장하여 탄생한 후신인 독일과의 적대관계는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게 되지만 그것은 이후의 이야기이며, 루이 14세 시대까지 프랑스의 라이벌은 오스트리아였다.[* 당장 루이 16세와 혼인동맹을 위해 결혼한 앙투아네트만 보더라도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년"'''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렸음을 생각해보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라이벌 구도는 그만큼 극명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